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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카이캐슬> 김주영의 냉정함과 예서의 욕망

by jadu79 2025. 6. 22.

“누구나 서울대 의대를 갈 수는 없다.” 이 말은 스카이캐슬의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는 듯 들린다. 그중에서도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과, 그녀의 제자가 된 강예서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인물이다. 김주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전략가이고, 예서는 그 전략을 기꺼이 따르는 능동적인 수험생이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고, 서로의 결핍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갔다. 한 명은 ‘합격’을 위해 인간성을 버렸고, 한 명은 인간성을 버리면서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목표만을 향해 달렸다. 이 리뷰에서는 김주영의 냉정함, 예서의 욕망, 그리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심리적 역학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다시 읽어본다. 단지 자극적인 한국 입시 드라마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무게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한 편의 묵직한 사회 심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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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카이캐슬> 김주영의 냉정함과 예서의 욕망

냉정함으로 만든 시스템: 김주영이라는 구조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김주영이란 캐릭터로부터 시작과 절정에 이른다. 김주영은 등장부터 다르다. 누구보다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십 년간 학생들을 명문대에 합격시킨 베테랑 입시 코디네이터지만, 그녀의 말에는 따뜻한 교육적 언어가 없다. 그녀는 학생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프로젝트로, 성공 확률을 계산하는 대상으로 본다.

 

예서에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학생이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성공 확률은 높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조차 인간적인 온기는 없다. 감정도, 동기도, 사연도 필요 없다. 오직 결과만 있다. 김주영이 무서운 이유는, 그녀가 악역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너무나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다. 감정이 개입될 여지를 원천 차단하고, 감정이란 ‘불필요한 변수’로 본다. 학생이 울어도, 부모가 불안해해도, 김주영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사무실, 그녀의 말투,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입시 기계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그녀의 냉정함은 ‘가르침’보다는 ‘설계’에 가깝다. 누군가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끄는 사람이 정한 규칙대로 상대가 맞춰야 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예서뿐 아니라, 한서진도 그녀의 설계도에 들어간다. 김주영이 무섭도록 유능한 이유는 단지 ‘학습법’에 있지 않다. 오히려 사람을 꿰뚫는 능력, 상대의 불안을 이용하는 법, 죄책감을 무기화하는 방식이 더 강력한 도구다.

 

그녀는 한서진이 자신보다 아이의 합격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예서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라는 단순한 한마디로 상대를 장악한다. 김주영이 만들어낸 시스템은 일종의 ‘심리적 복종 체계’다.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힘들다. 시스템이 정한 논리로만 판단하게 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 가능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김주영의 서사는 후반부에 가서야 조금씩 과거의 상처가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인간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작가는 김주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입시 구조의 끝’을 보여준다. 냉정하지만 유능한 사람. 감정은 없지만 결과는 보장하는 사람. 이 구조는 비단 입시만이 아니라, 회사, 병원, 정치 모든 영역에 이미 퍼져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성공만을 약속하며 인간성을 희생시킨다. 김주영이 무서운 건, 그녀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너무도 ‘정상적인 시스템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무너진 자아: 예서라는 이상한 아이

강예서는 흔한 수험생이 아니다. 단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공부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의대에 가고 싶어한다. “서울대 말고 의대요. 아빠처럼, 사람을 살리는 그런 일 하고 싶어요.” 이 말은 겉으로 보면 너무나 선하고 순수한 목표지만, 그 안에는 경쟁을 이겨야만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위태로운 욕망이 숨어 있다.

 

예서는 항상 자기 성적에 예민하고, 동급생의 점수에 신경 쓰며, 자신의 ‘1등 자리’를 끊임없이 방어한다. 단지 성적이 아니라, 정체성 자체를 성적으로 증명받고자 하는 아이. 예서는 어른들의 욕망을 반영한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경쟁의 잣대를 내면화한 독립적인 플레이어다.

 

그렇기에 김주영의 방식은 예서에게 너무 잘 맞는다. 감정을 누르고 목표만을 바라보는 방식.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태도. 김주영은 “지금 울면 내일 점수가 올라가나요?”라는 말로 예서를 조련하고, 예서는 그 말에 다시 정신을 붙잡고 돌아선다. 그녀는 한 번 무너졌다가도 곧바로 교과서를 펼친다. 자책하고 후회해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공부를 멈추면, 자신이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서는 시험지 유출 논란으로 코너에 몰렸을 때조차, 끝까지 버티고 싶어한다. “이번만 넘기면 돼. 나만 조심하면 돼. 엄마, 선생님, 다 날 도와줄 거야.” 이 독백은 예서가 얼마나 현실을 외면하면서도, 그 현실을 붙잡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서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그녀는 조작된 시스템에 들어간 희생자이지만, 동시에 자발적으로 그 안에 뛰어든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를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예서의 내면에 있는 ‘강박’을 들여다봐야 한다. 성공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삶, 1등을 놓치면 사랑도, 자존감도 흔들리는 존재. 이 아이는 누가 만들었을까. 부모? 학교? 사회? 아니, 모두가 함께 만든 것이다. 예서는 자신을 망가뜨리면서도, 그걸 ‘성장’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결국, 자아는 붕괴되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조종한 관계: 심리전의 절정

김주영과 예서의 관계는 단순한 지시와 수용이 아니다. 둘은 서로를 통제한다. 김주영이 전략적으로 움직이면, 예서는 감정과 욕망으로 반응하며 균형을 흔든다. 겉으로 보면 김주영이 예서를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예서 역시 김주영이 원하는 도구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주도적이다. 김주영은 ‘완벽한 학생’이 있어야 자신의 전략이 증명된다. 예서는 ‘완벽한 길잡이’가 있어야 자신의 욕망이 실현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는 공생 관계다. 하지만 그 공생은 본질적으로 파괴를 내포한다. 

 

한서진이 딸의 변화에 불안해할 때, 김주영은 말한다. “예서는 원하는 걸 얻게 될 거예요. 다만, 대가를 치를 뿐이에요.” 이 말은 예서를 향한 예언이자, 시스템에 대한 진실이다. 무언가를 원한다면 반드시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 그게 감정이든, 가족이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든 말이다. 예서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른다. 자아를 잃고, 관계가 붕괴되고, 남은 건 성적표뿐이다. 그리고 그 성적표는 더 이상 그녀의 꿈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 심리전의 끝에서 우리는 묻는다. 김주영이 예서를 망친 걸까, 예서가 김주영을 불러들인 걸까. 답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구조 속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교육 시스템은 학생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부모, 교사, 사회 모두가 영향을 받고, 동시에 책임이 있다. 김주영과 예서는 그 복잡한 구조의 가장 선명한 얼굴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교육을, 사회를, 욕망을 다시 보게 된다.

 

스카이캐슬은 자극적인 입시 경쟁 드라마로 시작하지만, 곧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단지 의대에 가고 못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 오갔고, 어떤 관계가 망가졌으며, 무엇이 남았는지를 질문하는 이야기다. 김주영의 냉정함은 단지 악인의 특질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추구해온 ‘성과 중심 문화’의 종착지다. 예서의 욕망은 단지 철없는 아이의 욕심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심어온 ‘성공에 대한 집착’의 결과다.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거울을 들이민다. 당신도 어딘가에서 김주영이었고, 동시에 예서였을지 모른다. 어떤 목표를 위해 감정을 누르고,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을 몰아붙였던 기억. 혹은 타인을 조종하거나, 조종당했던 순간들. 스카이캐슬은 그러한 기억을 끌어올리고,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면, 아마 당신도 그 성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