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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견디는 법을 묻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by jadu79 2025. 7. 10.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질문에 진심으로 답해준 드라마가 있다. 2022년 봄, 조용히 시작했지만 이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해방’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현실에서, 이 드라마는 일상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한 위로와 울림을 건넸다.


<나의 해방일지>는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그저 '사는 이야기'만을 담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드라마다. 이 글에서는 <나의 해방일지>의 기본 정보와 함께 줄거리를 정리하고, 이 작품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특별했는지를 세 가지 시선으로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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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견디는 법을 묻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이름 모를 무기력에 맞서는 세 남매의 기록

<나의 해방일지>는 JTBC에서 2022년 4월 9일부터 5월 29일까지 방영된 16부작 드라마로, 연출은 김석윤 감독, 극본은 박해영 작가가 맡았다.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등을 통해 감정선이 살아있는 인물 중심의 서사를 보여준 박해영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삶의 사소한 결핍과 고단함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제작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을 타며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종영 이후에는 "인생 드라마"로 손꼽히며 수많은 리뷰와 해석이 이어졌다.


이 드라마는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경기도 가상의 촌 마을 ‘산포’를 배경으로, 염씨 집안 삼남매의 일상과 그들 곁에 머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각자 고유의 결핍과 무기력을 안고 살아가는 세 남매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막내 염미정(김지원 분)은 조용하고 감정 표현이 서툰 인물이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지만 회사 안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고, 회식 자리에도 어색하고 억지로 참석해야 하는 인물이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듯 살아가지만, 내면에는 늘 허전함과 고립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런 염미정이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털어놓는 대상이 바로 구씨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추앙해 달라”는 기묘한 부탁을 한다.


둘째 염창희(이민기 분)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마땅한 직업 없이 서울과 산포를 오가며 갖가지 시도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보험설계사, 중고차 딜러, 성공한 형을 따라해보려는 유튜버 등 그때그때 다른 일에 도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그 실패는 자책과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그는 입만 열면 “나는 안 풀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자신조차도 자기 삶에 확신이 없는 상태다.


맏이 염기정(이엘 분)은 자기 표현에 솔직한 여성이다. 사랑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크지만 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며 반복되는 실망 속에 스스로를 더 갉아먹는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삶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하지만, 사랑은 늘 어렵고 멀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과 문제를 가진 세 남매는 산포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건 거창한 성공도,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도 아니다. 그저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 '벗어남'은 드라마가 말하는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남자, 구씨(손석구 분)는 삼남매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구씨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남자로, 술에 절어있고 무뚝뚝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운이 있다. 염미정은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추앙'이라는 단어를 건넨다. “사랑도 아니고, 관심도 아니고, 추앙해주세요.” 그 말은 염미정의 내면 깊숙한 곳, 존재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 말이었다.


드라마는 이처럼 세 남매와 구씨를 중심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감정들―무기력, 외로움, 사랑의 결핍, 일상에 묶인 피로감 등을 아주 현실적이고도 시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감정의 언어: 이 드라마가 특별했던 진짜 이유

<나의 해방일지>가 특별했던 이유는 ‘이야기’보다 ‘감정’에 방점을 찍은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보통의 드라마는 사건이 감정을 이끌어내지만, 이 작품은 반대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이 먼저 있고, 그 감정이 삶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따라가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가장 인상 깊은 건, 인물들의 대사다. 이 드라마에는 자극적인 대사도, 눈에 띄는 명언도 많지 않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심코 흘려보냈던 말들을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꺼내 놓는다. 예를 들면 “그냥 다 지긋지긋해요.”, “나 요즘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같은 문장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거나 마음속으로 삼켜봤을 법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아주 담담하게, 마치 기록이라도 하듯 읊조리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울린다. ‘이건 내 얘기다’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염미정의 캐릭터는 그런 감정 언어의 중심에 서 있다. 그녀는 극적으로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톤으로, 최대한 힘을 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누구보다 크다.

 

특히 그녀가 구씨에게 건넨 “저를 추앙해주세요”라는 말은 이 드라마를 상징하는 장면이자, 대사로 남았다. 사랑해주세요도 아니고, 좋아해주세요도 아니다. ‘추앙’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고 극단적이어서 처음엔 낯설게 느껴지지만, 곱씹을수록 그 속에 담긴 감정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말은, 곧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읽힌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감정은 ‘무기력’이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공허함, 아무 이유 없이 반복되는 피로, 그저 ‘사는 것’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이 중심축을 이룬다. <나의 해방일지>는 이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꾸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하길 요구받지만, 이 드라마는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다”고 말한다.

 

지친 감정을 애써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그게 해방의 시작이라고. 그래서 이 드라마는 힐링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위로 드라마다. 다만 그 위로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 대신 ‘너 지금 힘들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위로. 그것이 <나의 해방일지>만의 방식이었다.


또한, 이 드라마는 침묵의 힘을 보여줬다. 등장인물들은 자주 말없이 시간을 보낸다. 장면도 긴 호흡을 유지하며 인물들의 얼굴, 눈빛, 숨소리를 담는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나의 해방일지>는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보통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성장하거나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 그 변화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염미정이 더 이상 자신을 감추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구씨가 염미정을 마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염창희가 스스로를 조금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런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인물들의 삶을 바꾼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내면의 변화'라는 가장 현실적인 감정의 선을 끈질기게 따라간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 우리가 ‘구씨’를 사랑한 이유

많은 사람들이 손석구가 연기한 ‘구씨’에게 빠졌다. 그의 본명도, 정확한 과거도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말수도 적고 늘 술에 절어 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듣는 태도’가 있다. 말 많고 존재를 드러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묵묵히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는 존재다.


구씨는 흔한 힐링남이 아니다. 그도 상처투성이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하지만 염미정의 말에 응답하며, 조금씩 변화한다. “그 사람이 나를 추앙해준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조금은 덜 무서워졌어요”라는 대사처럼, 이 드라마는 구원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가만히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구씨’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기 힘든 ‘이해받는 느낌’을 대신 구현한 인물이다. 그래서 구씨와 염미정의 장면 하나하나는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순간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던 이유도 결국 이 '이해받음'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는 단순한 감정 소모형 드라마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오히려 ‘감정 회복’의 드라마다.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감정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말한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의 해방일지>는 다 보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어떤 이에게는 ‘내 얘기 같다’는 위로로, 또 다른 이에게는 ‘내가 몰랐던 내 감정’을 발견하게 만드는 여정으로 남았다.

 

해방은 거창한 게 아니다.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는 일, 나를 봐주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일, 그리고 스스로를 조금 더 알아가는 일이 바로 해방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우리가 매일같이 지나쳐온 그런 일상들을 비추며,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오늘도 잘 살아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