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처음엔 소란스러웠고, 종국엔 조용히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다. 주인공 박동훈(이선균)과 이지안(아이유)의 위로와 연대라는 주제는 물론, 이 드라마는 배경·음악·연출·연기 등 여러 층위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감성을 건드렸다. 특히 지금 다시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많다. 도시 감성, 박해준 열연, 그리고 우리가 놓친 비하인드까지. 당시엔 놓쳤던 도시의 질감, 인물의 복장, OST의 정서,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등 조용한 명작이 시대를 비추는 방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박해준이 연기한 ‘도준영’ 캐릭터는 악역 같지만 단순한 악인이 아닌 입체적인 인간이었다. 도시 안에서 관계를 소비하고, 권력을 좇으며, 사랑마저 전략화하는 인물. 이 드라마는 그런 준영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또 다른 단면을 비추기도 했다.
이번 글에서는 <나의 아저씨>의 도시적 배경과 문화 요소, 박해준의 명연기 재조명,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트리비아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 드라마가 단지 슬픈 이야기를 넘어, 한 시대의 감성과 정서를 어떻게 담아냈는지 그 결을 따라가본다.
도시라는 감정, 배경이 곧 서사였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서울시 구로구와 종로, 을지로, 성북구 일대에서 주로 촬영되었다. 대부분 재개발을 앞둔 낡은 주거지 골목,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 유흥가와 작은 선술집들이 함께 있는 공간들이다. 최근 드라마 추세는 해외 관광지 명소와 화려한 액션으로 시작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서울이라는 도시의 ‘속도’보다 ‘피로’를 먼저 보여준다는 점이다.
동훈의 출근길엔 늘 지친 사람들, 침묵 속 버스, 회색빛 도로가 있다. 지안의 퇴근길엔 가로등 밑에서 앉아 쉬는 청소노동자, 정수기 옆에 쪼그려 앉은 자판기 커피가 있다. 이 모든 풍경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는 사람들을 은유한다. 배경이 단순한 공간적 요소를 넘어서,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장치가 된 것이다.
동훈의 집은 무거운 가족사를 감당해야 하는 공간이고, 회사는 침묵과 감정 노동이 혼재된 공간이며, 지안의 반지하 방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장소’로 묘사된다. 이 도시적 배경은 감정을 침전시키고, 인물의 무게감을 덧입히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지안이 비 내리는 밤, 우산 없이 골목을 걷는 신이다. 좁은 골목, 비에 젖은 콘크리트, 거기서 천천히 걷는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긴 정적은 마치 도시의 외로움 그 자체를 형상화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또한 인물들의 복장도 시대적 맥락을 담고 있다. 동훈은 늘 짙은 네이비 계열의 셔츠와 회색 정장, 검정 코트를 입는다. 그의 복장은 마치 도시의 ‘감정’을 옷으로 표현한 듯 무채색이다. 지안은 커다란 후드와 어두운색 점퍼를 입고 다니며, 얼굴은 거의 화장기 없이 창백하다. 이런 스타일링은 캐릭터의 상황을 설명하는 동시에, 현실적 감각을 높여준다.
이처럼 <나의 아저씨>는 배경을 풍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배경 자체가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인물과 함께 움직이고 반응하며 서사를 이끌어간다. 도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주인공이 이 드라마엔 분명 존재한다.
박해준의 도준영, 단순한 악역이 아닌 시대의 그림자
박해준은 ‘도준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현대 조직 사회의 야망과 허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복합적 인물을 완성했다. 그는 성공한 임원이며, 겉보기엔 매끄럽고 능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인물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타인을 도구로 삼으며, 사랑조차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이 드라마에서 도준영은 단순히 박동훈을 밟고 올라가려는 경쟁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동훈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두려워한다. 회식 자리에서 조용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훈을 보며 “왜 사람들이 저 사람을 따를까?”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도준영이라는 인물이 가진 콤플렉스와 결핍의 뿌리를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박해준의 연기는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빛은 싸늘하고 계산적이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말끝은 늘 칼날처럼 날카롭다. 동훈의 아내 윤희(김윤아)와의 불륜 장면에서도 그는 위악적 매력이 아닌, 공허함과 파괴 욕망의 불안정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특히 후반부, 도준영이 자신이 쌓아온 성공이 무너질 것을 감지하는 순간들에서 박해준은 불안·질투·혼란·고립 등 복잡한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그는 전형적인 악역이 아니라, 성공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이 시대의 어른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허무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박해준은 이 작품 이후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새긴 후, <부부의 세계>에서 또 다른 악역 이미지로 주목받게 된다. 그 출발이 된 것이 바로 <나의 아저씨>였다. 도준영은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지만, 다시 보면 이 드라마의 인물 구조에서 가장 ‘시대적 초상’에 가까운 캐릭터다.
우리가 놓친 재미: OST, 트리비아, 감성코드
<나의 아저씨>는 대사가 적고 음악이 많다. 아니, 음악이 ‘말 대신 감정을 이끌어주는 구조’로 사용된다. OST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정승환의 〈눈물나게〉, 손디아의 〈어른〉이다.
〈어른〉은 드라마의 테마를 가장 잘 압축한 곡으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릴 적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라는 가사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실제로 드라마가 방영된 2018년 봄, 멜론 검색어 1위에 ‘나의 아저씨 ost’가 오르며 리릭 영상이 1000만 뷰를 넘기기도 했다.
이 외에도 “빈 방에서 듣는 발걸음 소리 같은 노래”라 불리는 이희문의 〈지나온 날들〉, 곽진언의 〈그런 날〉 등 모든 OST가 절제된 감정선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희문의 〈지나온 날들〉은 국악 창법의 절제된 한과 드라마틱한 선율이 어우러져, 마치 등장인물들의 눌러 담은 슬픔을 대변하듯 울림을 준다. 특히 박동훈이 말없이 퇴근길을 걷는 장면에서 이 곡이 흐를 때, 그의 짊어진 삶의 무게가 더 깊이 전달된다.
곽진언의 〈그런 날〉은 감정을 억누르다 문득 터지는 울컥함 같은 곡이다. 덤덤한 목소리와 담백한 기타 반주가 극의 정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장면마다 숨결처럼 스며든다. 이 곡은 특히 이지안이 혼자 자전거를 끌고 가는 장면, 혹은 할머니를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배경처럼 깔리며 ‘말 없는 서사’를 감싸준다.
재미있는 트리비아도 많다. 극 중 골목 포차의 실제 촬영지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으로, 현재도 성지순례 코스로 유명하다. 박해준은 실제로 박동훈 역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으나, 도준영 역을 자청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선균은 이 작품의 촬영 전 “말수가 적은 역할은 처음이었다”며 캐릭터 구축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밝혔는데, 결과적으로 ‘침묵의 연기’로 가장 큰 호평을 받았다.
아이유는 촬영 내내 대부분의 장면을 ‘화장기 없는 생얼’로 촬영했으며, 이는 연출진이 사전에 요구한 것이 아니라 아이유 본인의 선택이었다. 드라마 속에는 연출적 장치도 숨어 있다. 예컨대 이지안이 지하방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 동훈이 퇴근하며 사무실을 비추는 카메라의 수평 구도는 ‘상하관계’나 ‘무게감’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쓰인다. 이런 점에서 <나의 아저씨>는 영상 언어까지 철저하게 감정 중심으로 설계된 작품이다.
<나의 아저씨>는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드라마였고,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버티는 설명서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보면, 이 드라마는 도시와 인간, 감정과 시스템, 시대와 세대의 충돌을 섬세하게 직조해낸 하나의 문화적 기록물이다. 도시적 풍경은 배경이 아닌 감정이 되었고, 박해준의 도준영은 악역이 아닌 ‘현대적 인간의 단면’이 되었으며, OST는 말보다 먼저 감정을 이끌었다. 그 모든 것이 모여, <나의 아저씨>는 잔잔하지만 확실하게 깊은 강을 만들었다.
당장은 화려하지 않았고, 시끄럽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인생작’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히 감정의 시대를 건너는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누구나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말이 아닌 시선, 대사가 아닌 침묵, 성공이 아닌 관계를 말해주는 이야기. <나의 아저씨>는 바로 그런 날,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다.